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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남기용

슬기와 민—페리지 060421~170513

페리지 060421~170513은 기만하는 전시회다. 실제 공간에서 실존 작가가 실물을 전시하지만, 실질적인 감각적 만족이나 정서적 소통, 지적 통찰 따위는 제공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얄팍한 시각적, 언어적 감각을 자극하며 의심과 혼란을 부추기고, 이를 통해 의미와 관심의 부재를 숨기는 전시회다. 그래픽 소프트웨어에 딸려 오는 샘플 문서나 스톡 사진처럼 내용 없는 전시회, 세상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전시회, 어떤 가능성을 시뮬레이션하는 듯한 전시회.

제목은 2006년 우리가 첫 단독전을 열며 고안한 형식을 따른다. 전시 장소와 기간을 약속된 부호처럼 표기하는 형식이다. 물론, 페리지 060421~170513에서 ‘060421’은 이 전시의 실제 개막일이 아니다.

11년 시간을 암시하는 제목은 이 전시가 디자이너 최슬기와 최성민의 작은 회고전인 듯한 인상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2006년 이후 실제로 한 작업과 여기에 전시된 작품들의 관계는 명확하지도, 균질하지도 않다. 그리고 작품 사이에는 우리와 별 상관없는 요소도 드문드문 섞여 있다. 칼 세이건의 대중 과학 고전 코스모스(1980년)를 가리키는 화살표들이다.

전시 공간에는 (익숙한 판형으로 보건대) 포스터, 전단, 엽서 등 홍보 인쇄물 같은 물건들이 깔끔하게 진열되어 있다. ‘단명 자료’라는 제목이 붙은 연작으로, 넓게 보아 우리의 ‘인프라 플랫’(infra-flat) 계열에 속하는 작업이다. 마르셀 뒤샹의 ‘인프라 신’(infra-thin)을 응용한 인프라 플랫은 세계를 평평하게 압축하는 힘(예컨대 스마트폰으로 매개되는 즉시 소통 강박이나 데이터 수집 강박)이 도를 넘어 역전된 깊이감을 창출하는 상황을 가리킨다. 여기서, 실제 작품들은 인프라 플랫 개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도해 또는 샘플 문서로 기능한다. “마치 어떤 대상을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서 본 것처럼” 흐릿하게 처리된 이미지는 지지 구조(종이, 액자, 탁자 등 이미지를 지탱하거나 구현해 주는 물리적 장치)의 명료한 물질성과 대비된다. ‘포스터, 서울, 2007’이나 ‘엽서, 베를린, 2010’ 같은 부제는 사실을 꾸밈없이 전하면서도 딱히 유용한 정보는 드러내지 않는다.

같은 공간에는 ‘단명 자료’ 연작과 물리적 형태는 비슷하지만 가독성은 뚜렷한 작품 하나가 있다. 우리가 전시할 때마다 만드는 (그래 봐야 여태 한 번밖에 만든 적 없는) 『작품 목록』이다. 작품 라벨을 작품의 지위로 격상시키는 작업으로, 전시 작품의 제목, 매체, 크기, 연도 등을 소상히 밝힌다. 그 목록에는 『작품 목록』 자신에 관한 정보도 포함된다.

진열대에는 코스모스, 한국어 3판, 1981이라는 책이 놓여 있다. 제목이 드러내듯, 1981년 문화서적에서 펴낸 코스모스를 인프라 플랫 버전으로 변환한 것이다. 지면이 흐릿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판형·분량·인쇄·종이 재질·제본 방식·내용 등 모든 면이 원본과 같다—170 x 240밀리미터, 480쪽, 중질지에 4도 원색 오프셋 인쇄, 빨간 면지, 무선철, “퓰리처賞을 받은 금세기 최고의 행성연구가 칼·세이건이 실감나는 250여개의 圖版* 곁들여 생생하고 흥미 진진하게 펼** 놀라운 大宇宙의 身上明*”(일부 글자는 지면이 훼손되어 알 수 없음). 심지어 우리가 소장한 바로 그 판본에서 63쪽(‘생명을 지배하는 DNA’가 시작하는 장)이 36년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인가 찢겨 나간 점도 그대로 복제된다.

전시장 근처 어디엔가에는 『63쪽』이라는 작품이 있을 것이다. 어떤 책의 63쪽을 전부 또는 일부 확대해 액자에 넣은 물건이다. 이 작품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전시가 끝날 때까지도 못 정할 것 같다.

안내 데스크에서는 작품 설명이라는 책을 빌려 볼 수 있다. 우리가 지난 10여 년간 진행한 프로젝트 중 207개의 작업 의도나 과정을 일일이 말로(만) 설명한 책이다. 이미지만 있는 전시장에 이 책을 들고 가서 글과 그림을 비교해 가며 읽어도 좋겠지만, 아마 부질없을 것이다.

1층 로비에서는 『“코스모스는 두 개의 파이와도 같다”』가 상영된다. 우리의 지난 작업에서 매우 사소한 측면(매체, 수량, 연관 분야 등)을 파이 도표로 제시하고, 그 도표들을 해체해 무작위로 재조합하며 무한히 다른 추상 패턴을 보여 주는 데이터 비시각화 작업이다. 이 영상에는 코스모스에서 발췌한 구절들이 이따금 자막으로 병치된다. “사과 파이를 만들려면, 먼저 우주를 발명해야 한다.” 같은 글귀다.

“설명이 제대로 안 되는 전시는 좋은 전시가 아니다.” 그렇다고 한다. 사람들이 어떤 작품에 관해 궁금해할 때, 그들이 실제로 알고 싶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구성 원리나 얼개가 아니라 ‘작가의 의도’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왜 이런 작업을 하고, 왜 이처럼 미심쩍고 자폐적인 전시회를 여느냐고? 가장 간단한 대답은, 아마 ‘할 수 있으므로’일 것이다. 그 밖에는 우리도 모르겠다. 가짜 뉴스와 탈진실이 판치는 대안적 사실의 시대에 편승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슬기와 민—페리지 060421~170513 전시 리플릿, 2017년)

크레디트

참고

사진: 남기용

사진: 남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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