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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경태. 제공: 휘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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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와 민—1,056시간

‘1,056시간’은 44일이라는 전시 기간을 가리킨다. 제목이 암시하듯, 그래픽 디자이너 슬기와 민의 이 전시는 시간을 다룬다. 구체적으로, 전시 작품은 언어, 매체와 연관해 시간이 어떻게 물질화하는지, 어떻게 재료가 되는지 조명한다. 그러나 이런 주제를 깊이 파고드는 작품은 없다. 오히려 작품들은 작가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한 답변을 회피하듯 장난스레 스치고 지나가기만 한다. 실제로 전시 전체에는 농담 같은 느낌이 약간 있다. 작품 정보마저도 그렇다. “1초”나 “삼성 세리프 TV KQ55LST01AFXKR 55인치에 단채널 비디오” 같은 정보는 작품의 상영 시간이나 매체 말고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품들은 시간을 이해하는 데 중추가 되는 변화, 리듬, 반복 같은 개념을 점잖게 뒤튼다. 그리고 우리가 시간 매체에서 기대하는 바를 일부 허물기도 한다. 예컨대 『타임아웃』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 ‘동’영상으로, ‘러닝’ 타임 44일에 걸쳐 작품이 전시된 시간을 표시한다. 『공룡, 제3판』은 세계에서 가장 짧은 소설로 꼽히는 아우구스토 몬테로소의 『공룡』(1959년)을 한국어로 옮긴 작품으로, (스페인어 원작과 슬기와 민의 번역 모두에서) 일곱 단어로 이루어진 글은 여기서 단순 반복을 통해 네 배로 길어진다.

변화를 다루는 작품도 있다. 『전환들』은 애플 키노트가 제공하는 슬라이드 전환 효과를 이용해 흰 화면이 검정으로 바뀌는 열아홉 가지 방식을 보여 준다. 『우연서, 제4판』은 슬기와 민이 디자인한 여러 책의 분해된 지면 이미지들을 무수히 다양한 합성 페이지로 재조합한다. 『재료들』은 미술 재료 또는 매체 목록을 제시하는데, 속도가 너무 느린 탓에 언뜻 보면 화면에서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혼란은 장치(고화질 TV)의 선명한 물성과 뚜렷한 대비를 이루도록 흐릿하게 처리된 이미지 탓에 배가된다.

단순한 반복 운동은 슬기와 민을 언제나 매료시키곤 했다. 『통계 패턴 1』과 『통계 패턴 2』는 각 도표 형식에 내재하는 움직임 (원그래프는 회전, 막대그래프는 성장)을 포착해 무한히 반복한다. 『배경 이미지』는 슬기와 민 웹사이트 배경 GIF 애니메이션에서 발췌한 노이즈 패턴을 존재감 뚜렷한 디스플레이 장치 (거친 LED 스크린)를 통해 전경으로 증폭한다.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슬기와 민은 언제나 언어와 매체를 다룬다. 점점 많은 디자이너가 동영상으로 작업하는 오늘날, 이 전시에서처럼 작업을 시간 매체로 확장하는 데는 특이점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이 영역에서 작업한 것도 처음은 아니다. (전시 작품 일부는 이전에 다른 곳에서 선보인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이 비디오를 다루는 방식은 전형적인 모션 그래픽과 다르다. 예컨대 그들은 어떤 ‘이야기’도 전하려 하지 않고, 화려한 시각 효과로 관객을 압도하려 들지도 않는다. 당신을 이미지에 몰입시키려 하지도 않고, 스크린 안으로 뛰어들도록 유혹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당신이 장치 자체와 장치가 디스플레이하는 이미지의 관계로 시선을 돌리고, 매체와 내용을 하나의 통일체로 간주하기를 원한다. 이처럼 사물성을 강조하는 데 얼마간 연극적인 느낌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슬기와 민이 ‘미디어 아트’를 해석하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이지원, 소설가)

참고

사진: 김경태. 제공: 휘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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